Moon, Sujin

믿음의 형태: 불투명함에/에서 손을 뻗는 일



콘노 유키 (미술비평가)



『호수 일지』(2022.10)라는 책■에 실린 작가 문서진의 글은 작가가 호수에서 지내던 시기에 쓰였다. 이 책에는 〈살아있는 섬〉(2020)이라는 퍼포먼스를 진행했을 때 작가가 겪거나 경험한 내용이 글로 담겨 있다. 이 작품은 한겨울에 얼음판이 된 호수 위에 쌓인 눈을 매일 삽질하여 쌓아 올린 눈으로 섬을 만드는 작업이고, 2020년에 열린 개인전 《살아있는 섬》(CICA 미술관)에는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과 사진이 작품으로 소개되었다. 일기 형식으로 짧게 쓰인 글을 읽으면서 독자는 작가가 〈살아있는 섬〉을 진행한 날의 날씨, 온도, 호수 주변에서 있던 일, 작가의 신체적 건강과 심리적 고백을 만난다. 이렇게 설명하고 나니, 묘한 느낌이 든다. 『호수 일지』의 '호수'는 과연 어떤 것일까? 제목에 들어간 호수가 어디에 있냐고 하면 분명한 지리적 위치를 가진 곳이다. 그곳은 분명 호수가 맞지만, 눈과 얼음에 가려진, 실제로도 비유적으로도 '불투명한' 곳이다. 이 불투명함은 작가는 물론 독자인 우리에게도 전달된다. 눈으로 만든 섬의 무게나 그날의 기후, 심지어 이것들이 하루마다 누적된 조건 때문에 언제 깨질지도 모르는 얼음판의 두께를 작가가 신경 쓰면서 작업했던 것처럼 영상과 사진으로 기록된 〈살아있는 섬〉을 보는 관객과 호수일지의 독자도 호수의 존재, 그 존재의 두께를 짐작할 수밖에 없다. 작가와 관객, 그리고 독자가 공유하는 불투명함은 작품 〈살아있는 섬〉이 거기에 계속 있는=유지되는 동안 믿음의 형태를 지니게 된다. 일지의 끝부분에 작가가 매번 남긴 한마디, "호수와 내가 무사하길 바란다"처럼 우리는 호수라는 존재의 두께를 〈살아있는 섬〉이 '잘 진행된'—달성이나 성공이라는 표현과 다른—것을 보여주는 기록인 영상과 사진, 그리고 『호수 일지』라는 글을 통해서 믿는다.

잘 진행된다는 것은 달성이나 성공을 이루는 것과 다르며, 도약이나 발전도 아니다. 잘 진행된다는 것, 이는 수평적인 것이다. 〈살아있는 섬〉에서 '잘 되어 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눈으로 만든 섬이 커질수록 증대되지만, 그만큼 호수의 무게 부담은 물론 비유적으로 보자면 작가의 심리적 부담 또한 커져 간다. 하지만 부담은 불투명한 호수의 측정하지도 못하는 두께에 맡겨지면서 동시에 믿음이 된다. 호수와 작가 사이에서 나오고 유지된 믿음과 마찬가지로, 삽질이라는 행위 또한 작품에서 믿음의 수평적 관계를 보여준다. 빙판 위에서 작가가 직접 삽질하여 하루마다 눈을 쌓아 올리는 일은 땅에서 땅으로 옮겨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눈이 녹는다는 자연의 거스를 수 없는 힘보다는 삽질이라는 행위 자체이다. 일반적으로 삽질은 보이지 않지만 그 안에 있는 무언가를 찾는 행위인데, 〈살아있는 섬〉은 빙판 위에 눈을 쌓아 올리는 가시적인 일을 통해서 형태를 갖게 된다. 말하자면, 안에 찾고자 하는 무언가가 있(겠)다고 생각해서 계속 파내는 행위가 양각된 모습이 호수 위의 섬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머릿속이나 마음속으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대상은, 〈살아있는 섬〉에서 보이지만 실체가 거의 없는, 그러나 확실히 있는 것=대상으로 빚어진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수평적인 관계이다. 만약에 그의 작업을 대지미술의 맥락으로 이해한다면, 자연과 인간적 행위의 충돌이나 자연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인간, 또는 자연 속에서 작게나마 구현되는 인간의 손맛 같은 구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문서진의 작품에서 핵심은 자연과 인간의 대립이나 양자의 친화적 구도가 아니라,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 사이에서 믿는 일에 대해 접근한 점이다. 빙판이 깨지면 호수는 투명하게 보일 것이고, 눈으로 만든 섬은 이내 가라앉아 없어질 것이다. 불투명한 호수 위에서 두께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 이 아슬아슬한 상태에 실체가 거의 없지만 무게가 나날이 증가하는 눈섬은 믿음의 형태를 시각적으로 만들어 낸다.

불투명함은 투명하지 않다. 하지만 없는 것은 아니다. 기대와 의심 사이에서 태어난 불투명함에는 믿음의 형태가 자리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기대와 의심, 그리고 믿음은 추상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형태'라는 말을 강조하였듯이 문서진의 작품에서 믿음은 물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믿음을 보내는 대상의 실체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머릿속과 실제, 이 두 곳에 걸쳐 있다. 지난 개인전 《맨질맨질하고 딱딱한 삶에 대한》(레인보우큐브, 2022)에서 소개된 일련의 작품도 그렇다. 이 전시에서 작가는 청소년기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리는 일을 작품에 다뤘다. 전시장 밖에 놓인 〈전화번호부 비석〉(2022), 전시장에는 전화번호부에서 추출한 글자를 금속활자로 만든 〈전화번호부〉(2022)가 벽에 붙어 있고, 할머니가 습관적으로 하시던 말을 모아 그의 손 글씨로 편집하고 이를 3D로 출력하여 물에 젖은 유산지에 형압으로 찍어낸 〈그의 침묵: 그의 말〉(2022)에서, 관객은 물체인 작품을 만지고 감상하며 그 너머에/에서 할머니라는 '인물/상'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물(의 )'상'에 머무른다. 말 그대로 '인물의 이미지'인 '인물/상'은 사물의 곁을 인간이 떠났을 때 그 괴리(/)와 함께 나타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남긴 물건, 이를 보고 그 사람을 떠올리는 일에서 사물과 인간의 관계는 양자를 서로의 흔적으로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물과 인간 둘 다 흔적으로 자리하게 되면서, 전환이 여기서 일어난다. 인간의 소유물인 사물은 인간의 부재를 직면하면서 그 실체에 인간을 흔적으로써 소유하게 된다. 할머니의 글씨체나 그가 반복해서 내뱉은 말들은 작품을 통해서 그 질감을 담는다. 질감은 불투명함에서 획득된다. 인간 흔적을 담은 사물이 인간을 흔적으로 드리우게 될 때, 그것은 호수의 두께를 짐작과 의심 사이에서 바라본 시선과 일치한다. 불투명함은 경계면인 동시에 접촉면이다. 지금은 닿을 수 없는 존재를 떠올려 다가가는 것은 그때와 지금 사이에서 거리를 엄연히 두고 있지만, 그 사이에서 태어난 불투명함 위에서—비록 상에 머무를지라도 이 머무름에 단단함을 가져다준다.

여기서 말하는 단단함이란 물성적으로 단단하다는 뜻뿐만 아니라 이미지로써 확실히 자리를 잡는다는 뜻도 포함한다. 작품 〈내가 그린 가장 큰 원〉(2016)은 작가가 누워서 자신의 팔 끝, 손끝이 최대한 닿는 곳에 표시하는 작업이다. 내가 가장 크게 그린다고 할 때, 밖에 서서 그리고 그 결과가 내게서 멀어지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작품은 본인의 최대치를 통해서 그린 것이다. 단번에, 단숨에 그려지지 않는 선은 자신이 손을 뻗을 수 있는 최대치에 따라 원의 크기가 결정되는데, 그 최대치를 유지해야만 온전한 원 모양이 나온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그려진 선은 오래 남을 것 같지 않은, 짧은 선들이 이어져 하나의 원을 이룬다. 이 작품은 중심점을 둔—비유적으로도, 실제 작업 과정에서도 둔—내부=나에서 시작한다. 선을 손으로 그려나가는 동작은 〈살아있는 섬〉에서 공사용 중기 대신 작가가 직접 삽질을 한 것과 같은 태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작가의 행위는 기계가 아닌 인간미나 손맛을 강조한 것이 아니다. 그와 달리, 문서진의 작품은 어떤 대상을 향해 손을 뻗는 믿음이라는 행위가 형태로 자리 잡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내가 그린 가장 큰 원〉은 밖으로 향하는 힘과 원 모양을 유지하는 힘이 수평적이어야=균등해야 내가 가장 크게 그린 결과가 나오는, 그런 작업(=일 work)이다. 안으로부터 뻗어 나가고 또 안에서 뻗치는 힘이 여린 선으로 그려진 윤곽을 지탱한다. 남은 원 안에는 비록 평평하고 텅텅 비어 있을지라도, 안에서 뻗어나가 바깥과 경계를 그은 존재가 감각적으로 여전히 머무른다. 〈살아있는 섬〉이 존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그린 가장 큰 원〉 또한 불투명함에 계속 있는=유지되는 동안 존재한다. 그리고 그곳에, 불투명하지만 작가라는 실체가 존재한다.

흔적의 전환은 〈비우기: 몸으로〉(2018)에서 눈이나 모래에 찍힌 글씨가 아니라 이미 방향마저도 새겨진 단단한 돌이 된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원통형의 조형물을 굴려 가는데, 이 과정에서 바닥에는 짧은 글씨가 찍힌다. 보는 사람에게는 원통에 반전된 채 또는 바닥에 찍히자마자 작가가 남기는 발자국에 의해 지워져서 확실하게 보기 힘들다. "... 지우려는 노력마저도 / ..우고 / …는 마음마저도 / … "처럼 남은 글씨, 이 흔적은 오히려 이미 기록되어 있는 말들을 향하고 작가의 발걸음은 이를 깨부숴 가는 것이 된다. 눈이 녹고 파도가 덮치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불투명함을 만드는 과정은 발자국이라는 흔적에 단단한 신념을 더 부여한다. 유사성에 기반해서 이해했을 때, 혹자는 문서진의 작품 전반을 보고 알베르 카뮈가 분석한 「시지프의 신화」를 금방 떠올릴 것이다. 이 신화에서 시지프는 형벌을 받아 평원에서 산꼭대기까지 돌을 굴려 가는데, 카뮈는 이 불행한 자의 모습에 의식을 가지고 보내는 삶의 긍정성을 찾는다. 그런데 필자가 더 주목하고 싶은 점은 단단한 돌을 굴리는 행위의 유사성이 아니다. 글 「시지프의 신화」에서 카뮈의 시선은 돌을 산꼭대기까지 굴리는 행위에서 평원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향한다.■■ 이 과정을 "의식이 뻗어 팽창된=긴장된 시간"이라고 설명하면서, ■■■ 카뮈는 온 길을 다시 돌아가는 모습에 돌보다도 단단한 희망을 읽어낸다. 이 긴장=의식의 팽창이 문서진 작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안에 유지되는 힘이 내포되어 있는 것, 그것은 발자국의 전진에 원통형 구조물에 이미 나오는 결과까지 새긴 것을 능가하는 강력한 힘을 표시한다.

사람이 〈전화번호부 비석〉 앞에 서 있다—말도 없이. 이 작품은 개인전 《맨질맨질하고 딱딱한 삶에 대한》에서 가장 눈에 띄게 단단한 소재로 서 있다. 이 작품에 우리가 보는 것은 말이 없으시던 할머니의 모습이다. 할머니가 적어놓은 몇 개 안 되는 전화번호부 너머, 작가가 본 할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반복되는 말만 내뱉던 할머니의 모습은 말이 없는 비석과 같다고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설령 작가는 보지 못했을지라도, 할머니가 전화부를 펴고 번호를 눌렀을 때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작가가 알고 지낼 때, 할머니는 말이 잘 없던 것이 아니라 말을 꺼내지 않았을 뿐이지 않았을까. 〈전화번호부 비석〉의 단단함은 말이 잘 없던 할머니의 실체와 겹칠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거기에 있던 힘을 보여준다. 〈내가 그린 가장 큰 원〉에서 텅 빈 원 안에 작가의 힘이 여전히 뻗어 있는 것처럼, 말이 잘 없으시던 할머니는 분명, 전화번호를 누르고 어딘가에 있는 어떤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을 것이다. 비석은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말하지 않는 모습에 전하고 싶은 말을 담을 수 있다. 우리가 비석에 손을 대어 새겨진 번호를 만지는 일, 그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어루만지는 것이다. 어루만진다는 것은 닿을 수 없는 것을 대신하여, 남은 것 너머에 손을 뻗고 내 마음에 닿는 일이다. 카뮈가 들여다본 단단한 희망을 문서진의 작품에서는 믿음의 형태로 보여준다. 움직임을 잃은 돌 앞에, 더는 살아 있지 않거나 움직임을 결여한 그것—그곳에, 사람이 서 있다.



■ 문서진, 『호수 일지』, 돛과 닻, 2022.10

■■ アルベール・カミュ, 清水徹, 『シーシュポスの神話』, 新潮社, 1969 (알베르 카뮈, 『시지프의 신화』, 일역본) p. 213

■■■ アルベール・カミュ, 같은 책, 같은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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